코로나19 이후 교회의 길:

생명을 살리는 역동적 공동체로 거듭나라

이상훈 교수

 

코로나 19의 여파가 거세다. 재앙을 겪어보지 못했던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코로나 사태는 인류 문명의 실상과 한계를 체감하는 실증적 사건이 되었다. 무엇보다 팬데믹 현상이 수개월째 지속되면서, 이제 역사는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상황으로 나뉘어질 것이다. 물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그림은 매우 불분명하다. 단지 바이러스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됐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가상/증강현실(AR/VR), 로봇 등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진화는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뉴노멀(new normal)은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의 발전은 머지 않은 시간에 재택근무, 화상회의, 온라인 교육, 드라이브 스루(Drive thru) 등과 같은 비대면(untact) 문화를 낳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충격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가 우리 시대에 전격적으로 실행된 것 뿐이다.

이러한 급격한 상황 변화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 교회를 위기와 도전 앞에 서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과학과 기술 혁신이 가져올 사회 변화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습은 교회를 생존 게임으로 밀어 넣었다. 말 그대로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많은 교회들이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희망이 있었다. 급하게 온라인 예배를 도입하고, 한 주 한 주를 힘겹게 버티면서도 곧 원래 상태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더 뜨겁고 열정적이며 감격적인 예배를 드릴 거라는 전망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과 함께…

그러나 막상 다시 예배당에 모이게 된 지금 교회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렵다. 비단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와 제한성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몇 개월의 공백 기간이 가져다준 질문과 문제 제기가 크다. 코로나 19는 교회가 그동안 의심 없이 믿고 실행해 왔던 여러 사역들, 특히 목회 성공의 척도가 되었던 성도 수와 교회 건물, 프로그램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을 한 곳에 모이게 하기 위해 큰 건물을 짓고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는가. 한때 이러한 시도가 교회 성장의 공식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문제는 성장이 멈추고 성도 수와 재정이 줄어들고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명백해진 시점에도 이러한 관성은 멈출 질 몰랐다는 점이다. 아니, 스스로 제어할 힘을 상실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만 같다.

코로나 19는 교회를 멈춰 세웠다. 스스로를 뒤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재고할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그토록 외쳤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며, 교회의 사명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냄 받은 성도의 수와 삶의 질이라는 것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위기이며 동시에 기회임이 분명하다. 만약, 이 시점에도 교회의 가치와 방향이 하나님 나라와 선교에 맞춰지지 않는다면 촛대는 옮겨질 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은 생존을 고민할 때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 구별된 거룩한 백성의 모임이기에 본질과 사명에 충실한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 지금이 적기다.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본질적 회심이 필요하다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론적 목적과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코로나 19 이전의 교회는 집합적이고 모이는 사역이 중점을 뒀다. 당연히 교회는 건물과 성직자,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교회들은 남들보다 더 좋은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클수록 성도들은 더 수동적이며 소비적인 신앙인이 되어 간다. 종교적 서비스를 받기 위해 오는 성도들이 많아진 것이다. 또한 모이는 교회를 강조할수록 일상의 영성과 멀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추상적(abstract)이며 이원론적인(dualistic) 영성의 강화가 일상과 관련 없는 왜곡된 신앙관을 형성시켰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됐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의 아픔과 문제를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아성을 구축하는 집단처럼 비춰지는 아픈 결과가 나타났다.

코로나 사태를 통과하면서도 종교를 향한 세상의 평가는 더욱 냉정해졌다.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진행한 한 좌담회에서는 ‘코로나 사태라는 중차대한 시국에 종교가 한 역할이 없다.… 코로나는 종교의 위상 격하의 계기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오갔다.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 실천했던 섬김의 노력들은 모두 사라지고 부정적이며 단편적인 평가가 불편하고 아쉬웠지만, 그것이 현재 종교와 교회를 향한 세상의 평가라면 이 또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세상의 기관과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제 살을 깎듯, 교회 역시 생존하기 위해 선택했던 여러 행동이 사람들의 눈에는 이기적이고 비본질적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개 교회의 위기를 넘어 교회 공동체 전체에 닥쳐온 위기 임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의 미래는 한두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 전체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회가 회심해야 한다. 핵심가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기초와 기본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 즉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구별된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다시 세상을 위해 보냄 받은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이후 교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라

코로나 19는 모이는 교회를 한순간에 흩어지는 교회가 되도록 만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었기에 교회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중 예배 대신 스크린 앞에서 혼자 혹은 가족 단위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성도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오랜만에 드려보는 가족 예배를 통해 평상시 느끼지 못했던 예배의 회복과 가족의 중요성을 체험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낯설고 고독한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그중에는 다른 교회 예배를 서핑하거나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도들도 발생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회중 예배에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지 않은 성도들이 발생했고, 이들 가운데는 오프라인 예배가 시작되어도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교회 주변부에 머물며 결국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이 사태가 더 가중될 것이라는 예측이 심장을 떨리게 한다.

또 다른 고민은 다음 세대와 관련된 문제다. 얼마 전 국민일보가 ‘주일학교사역자연구소’ 조사에 근거해 ‘코로나 19 기간 동안 주일학교 사역은 사실상 중단됐다’는 보도를 했는데 이 또한 탈출구 마련이 쉽지 않은 주제다. 최근 전략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시나리오 분석 기법을 활용해보자. 최악의 경우, 신약 개발이 지연되고 교회 모임이 지금처럼 여러 제한 요소를 안게 된다면, 또는 변종 혹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해 작금의 현상이 되풀이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 기존 성도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다음 세대에 대한 대안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이런 현실은 교회 중심적 사역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다. 교회의 건강성을 측정할 때, 이제까지 우리는 성도들의 일상의 삶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간과해 왔다. 주 6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다.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는가. 사도행전 8장 4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핍박이 왔을 때 흩어진 성도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신앙의 진면목은 함께 있을 때도 중요하지만, 흩어졌을 때 드러난다. 성령에 충만한 성도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증인 됨의 삶을 산다. 그것은 전혀 특별하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성도들의 영적 생활을 더욱 면밀히 들여다보고 일상의 삶에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사역의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성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역동성이 발생할 수 있다면 성도들은 자기 삶의 현장을 선교지로 여기며 그곳에서 제자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가정을 선교지로 여기면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기 위해 가정 예배와 신앙 교육을 충실히 할 것이고, 주변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기회를 찾고 나눔을 실천할 것이다.

이렇듯 작은 단위가 살아야 한다. 교회의 구조적 측면도 그렇다. 최근 북미지역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는 많은 교회들이 더 이상 거대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큰 교회 건물을 만들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큰 예배당 대신 소규모의 예배당을 만들고, 교회를 여러 곳으로 나누어 성도를 분산화(decentralization) 시킨다. 이는 크고 화려한 것 대신 작고 진정한 공동체에 속하고 싶어 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고, 지역과 이웃에 기반한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 하나의 예가 멀티사이트(multisite) 교회 현상인데, 지금 북미 지역에는 5,000개 이상의 멀티사이트 교회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의 기본 단위를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y)나 가정 교회(house church)로 삼고, 성도들이 중심이 된 소그룹 사역에 역량을 기울이는 교회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휠씬 더 강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더 역동적으로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새로운 구조는 전통적인 구조와 정 반대 모습을 띤다. 전통적 구조가 위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탑-다운 형식이고 소그룹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했다면(그림 1), 새로운 구조는 소그룹 자체를 자생적으로 형성 및 재생산하고, 교회는 그러한 그룹들이 세상을 섬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력과 재정, 프로그램을 서포트(support)한다(그림 2). 당연히 교회 구조는 단순해지고(simple), 사역은 유기적이며(organic), 내용은 선교적(missional)인 특징을 갖는다. 

church top down structure

<그림 1: Top-Down의 전통적 구조>

organic church

<그림 2: 소그룹 중심의 유기적 구조>

 

이를 좀 더 확대해 본다면, 선교사로서의 개인을 세우고, 그 개인이 있는 가정이 교회가 되며, 가정과 가정이 만나 선교적 소그룹을 형성하고, 선교적 소그룹이 모여 허들(Huddle: 50~100명 사이의 중형 사이즈 주 중 모임)을 형성하고, 허들이 모여 캠퍼스 교회가 되고, 캠퍼스 교회가 모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교회는 리더십이 분산될 뿐 아니라 많은 평신도 리더를 필요로 한다. 사역의 틀과 내용이 변하지 않고서는 이런 교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역의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기적이고 자생적이며 선교적인 리더와 소그룹이 존재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다.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대량생산하던 근대주의적 사역은 이제 끝났다. 지금은 개별적이고 독특하며 특색 있는 맞춤형 사역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 누구도 틀에 박혀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틀 밖에서 자유를 누리되 자신의 가치와 재능이 존중되고 펼쳐질 수 있기를 원한다. 복음은 개인을 속박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역동적 성도를 만들고, 이들이 모여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소그룹 기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라

필자는 최근 저서 <리싱크 처치>를 저술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반 서적을 읽었다. 교회가 시대에 적응하고 변화하기 위해 세상의 기업과 조직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서 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략과 전술 이면에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기본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가치’와 ‘정신’이었다. ‘창업자 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비전’과 ‘사명’ 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회와 세상의 유익을 위한다는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교회가 세상의 유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비극은 교회가 세상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평가다. 물론, 이러한 평가에 교회는 매우 억울할 수 있다. 많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도 그랬다. 적어도 필자가 가까이 하고 있는 교회들은 이 기간에 세상을 섬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기독교 신문에서만 화자 되고, 세상 매체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되 일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선교학에서 강조하는 가장 기본적인 101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보라. 하나님 역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이곳에 오셔서 인간의 말과 문화를 배우시고, 우리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교회는 들어야 한다. 듣지 않고 배우지 않는 교회는 과거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환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려면 세상으로부터 듣고 배워야 한다.

둘째는 세상의 아픔에 참여하는 일이다. 복음은 약한 자들을 향한 공감과 참여를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는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셨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세상은 각박해지고 아파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통이 서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더 큰 혼란과 아픔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경제의 문제, 소외의 문제, 정신의 문제, 각종 상처와 스트레스, 상실의 아픔에 노출된 사람들이 많다. 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 것인가. 누가 그들을 돌봐주고 보듬어 줄 것인가. 그것이 바로 교회의 책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가 된다는 본회퍼의 말처럼 낮고 연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세상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다. 그것이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교훈이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기독교의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에서 초대 교회가 어떻게 시대적 핍박과 저항을 뚫고 로마를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실감 나게 묘사한다. 결국 그것은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인 역병 속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의 위협도 초월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 하는 순교적 영성은 의지적으로 죽기 위해 자신을 꺾는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된 성도들이 그 사랑을 전하는 삶에서 발현되는 현상이다. 교회가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 그것은 그들과 함께할 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채워주는 것을 동반한다.

뉴욕의 브루클린 성막교회(Brooklyn Tabernacle Church)가 좋은 예이다. 범죄와 폭력, 가난이 난무하던 뉴욕 할렘가에 비가 새고 천정이 내려앉을 정도로 열악한 건물에서 20명의 성도와 교회를 시작했던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는 성령을 의지해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교회를 만들었다. 의사, 변호사뿐 아니라 마약 중독자, 출소자, 홈레스 들이 함께 하는 교회, 그리고 그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을 통해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로 쓰임 받고 있다. 필자가 자주 언급하는 엘에이의 드림센터(Dream Center)도 마찬가지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교회로 유명한 이 교회는 코로나 19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자원을 활용해 도움을 펼쳤다. 하루 종일 기부를 하기 위해 몰려든 차와 사람들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그들을 작은 영웅으로 환대하고, 누구든 기부된 물품과 물자를 받아 갈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장면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해 생중계하고 작은 자원을 나누고 세상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인지를 전파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이 기부를 하고 도움을 받는 장이 열리자 그곳은 웃음과 감격, 눈물이 끊이지 않는 현장이 됐다. 누가 과연 이런 교회를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과연 이런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이렇게 대담하게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 활동을 하지 못할까. 이렇게 크고 힘 있는 교회들이 많은데… 왜 우리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할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선 행하기를 그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네 번째는 복음으로 초청하는 일이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세상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은 돈과 물질이 아닌 생명이다. 생명을 전하기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교회가 주눅 들었다. 성도들도 교회도 세상의 눈치를 본다. 교회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통로를 다양화해야 한다.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그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다. 분명한 점은 이 시대는 과거보다 훨씬 더 관계 중심적이며 공동체적 접근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을 감추는 익명성과 안전성을 추구하는 시대일수록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복음 전도는 불가능하다. 다시, 여기서 성도 개인의 선교적 정체성과 소그룹 공동체의 사역이 핵심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단지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믿음(believing)과 소속(belonging)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뢰를 쌓고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키워내라. 그것이 힘이 될 것이다.

 

Untact에서 Ontact, 다시 Contact 중심축을 바꾸라

코로나 19가 가져다준 가장 강력한 충격과 교훈은 비대면, 비접촉 사회의 도래로 발생한 라이프 스타일이다. 인간이 서로 대면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또 적응해 가고 있다. 기업들은 이미 언택트 비즈니스 전략을 세워 비대면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결국, 세상의 이러한 흐름은 언택트 시대를 안착시키고 홀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언택트와 함께 떠오르는 말이 온택트(ontact) 문화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외부와 연결해 주는 온라인 문화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 역시 언택트에서 온택트로의 흐름에 빠르게 동참하고 있다. 유튜브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예배 실황을 중계하고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어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열심이다. 이러한 흐름은 작은 교회들에도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사회는 이미 자본과 노동, 기술 집약적인 TV 중심에서 1인 미디어 시대로 변해 가고 있다. 과거 미디어는 대형 교회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교회의 크기를 떠나 차별화된 콘텐츠를 통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온라인과 미디어 사역은 코로나 19 이후 더욱 발전할 선교 영역이다. 무엇보다 교회 밖 사람들과 세대들에게 선교 콘텐츠를 제공하고 나누며 초청할 수 있기에 SNS와 온라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는 미래 선교 동력의 핵심이 될 확률이 높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역 원리가 있다. 그것은 ‘언택트’에서 ‘온택트’로, ‘온택트’에서 다시 ‘컨택트’로 옮겨 가는 사역의 흐름을 만드는 일이다. 온라인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온라인 교회를 생각하기는 쉽지만, 오프라인에서처럼 헌신도가 높은 성도를 만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을 복음에 접촉시키고, 다시 신앙 공동체로 포함되게 할 것인가는 계속 고민하고 풀어야 할 과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것이다. 새들백 교회의 경우 수천 개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어 전 세계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지만, 그들의 목적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오프라인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사역의 특성과 내용에 따라 이 원칙이 반드시 적용될 필요는 없다. 온라인 특성에 따라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인 앤 아웃(in and out)이 자유로운 공동체 형성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곳을 선교지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단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24시간 연결되어 있고 머무는 장소에서 선교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이민자들인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사역은 완전히 틀 밖에서(out of box) 상상하고 체험하고 시도되어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자신만의 재능과 관심, 부르심을 놀이와 재미, 의미 등과 결합시켜 창조적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복음을 통해 연결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와 권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 그 본질을 위해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리더여, 선교적 크리에이터가 되라

코로나 19가 교회에 던진 과제는 너무나 크다. 솔직히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대면하고 풀어가는 일 자체도 버겁다. 그러나 지도자는 미래를 보아야 한다. 당장의 문제를 넘어 내일을 보고 미래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예측하고, 시나리오를 만들며, 꿈을 꾸어야 한다. 시대에 짓눌린 지도자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탁월한 영성가이면서, 미래의 예언자이고, 나아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사역을 촉진시킬 수 있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대를 비관하지 말라.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믿고, 어떻게 그 사역에 동참할 것인가 분별력을 가지고, 새로운 영역에 자신을 던지는 용기와 결단을 갖는 것이다. 놀랍도록 창의적인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범주를 벗어난 방식으로 세상을 흔드신다. 그렇게 세상의 관성과 질서를 재편하고 계시다. 우리가 가장 절망스럽게 느끼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솟아나고 있다. 그것을 믿음으로 보고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교적 크리에이터(creator)의 운명이고 가야 할 길이다.

 

글쓴이:

이상훈 교수는 America Evangelical University(LA 미성대학교) 총장, Fuller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Missional Church Alliance(MiCA) 디렉터, 리폼처치, 리싱크처치 등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