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박사의 넥스트 처치

목회 지형이 흔들린다

20세기 말 세상은 온통 Y2K라 불리는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1900년대에서 2000년대로 바뀌게 되면, 컴퓨터가 날짜를 인식하는 것에 혼돈이 생겨 날아가는 비행기가 떨어지고 방사능이 누출되며, 금융망에 혼돈이 생기고, 잘못하면 핵미사일까지 발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극에 달했던 Y2K의 공포는 2000년 1월 1일 새 해가 시작되자마자 한 날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회의 공포는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급성장을 이루었던 한국교회는 당시 정체기를 맞이했고, 이후 여러 곳에서 부식과 쇠퇴의 신호를 나타내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교회는 그러한 위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90년대에 해왔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대형교회가 개최하는 세미나와 콘퍼런스에는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많은 교회들이 새 건물을 짓고 있었고, 그 이면에는 빚을 내서라도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으면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또한 깔려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노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때나 오늘이나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렵다. 현상유지 조차 쉽지 않은 것이 오늘날 목회 현실이다.

필자가 미국에 온 것이 바로 2000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교회를 배우고 그 배움을 고국 교회에 접목해 앞서가는 목회를 하겠다는 순진한(?) 마음이 앞서 있었다. 물론 석박사 과정을 하는 8년 동안 양육비를 벌며 학위 과정을 쫓아가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대신 두 한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성장의 기쁨과 깨어짐의 아픔을 느끼며 목회 현장의 냉정한 현실을 배울 수 있었다.

8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본 미국의 주류 교회들은 이미 쇠퇴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한국교회 역시 빠른 속도로 미국의 전철을 따르고 있었다. 원인은 건물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그램의 문제도 아니었다. 시대가 변했고 문화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급속한 기술의 발전 속에 세속주의와 다원주의, 과학주의가 부상하고, 문화적으로는 포스트모던적 사고와 사상이 지배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광속화처럼 빠른 변화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자 시대를 예측하거나 대비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유발 하라리는 이 같은 맥락에서 “예측을 할 수 없으니 미래에 추구할 목표나 가치를 결정할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이런 일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말이다.

종교에 대한 인식과 반응이 달라지는 것 또한 필연적 결과였다. 과거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삶의 안정과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는 엔터테인먼트와 가상 공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또 교회들이 과거의 경험과 관행에 머무르며 그동안 쌓아온 부와 권력을 탐닉하는 동안 교회 밖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더 싸늘해졌다. 젊은 사람일수록 권위적이고 제도적인 기성 종교를 불신하고, 무관심은 커져만 갔다. 세상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며 자기 자신에 함몰되어 있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란 기대는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교회의 위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작고 연약한 교회 뿐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도 같은 고민을 한다. 솔직히, 수 천명의 신도를 가진 메가처치들도 돌파구를 찾기에 목이 마르다.

목회 지형이 흔들린다. 이제는 그동안 목회를 떠받쳐 왔던 과거의 성공 방식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누구나 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목회,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적인 목회가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새롭고 창의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그러한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쓰여졌다. 어떻게 생존을 넘어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사이즈와 규모의 차원을 넘어 성경적이고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고 성령이 이끌어가시는 참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그 답을 찾는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그러한 지형에서 발생했다. 적대적이며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발생했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